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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 공부를 안 하고도 외국어 공부가 될까? 나의 외국어 학습기

연K 2024. 11. 10. 18:32

나는 4개 국어를 한다. 모국어인 한국어를 제외하면,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순으로 배웠다. 어려서부터 외국어에 노출된 환경에 살았던 것은 전혀 아니다. 20대 초반까진 모국어인 한국어만 할 줄 알았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외국어 할 줄 안다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이나, 실제로 그 언어를 이용해 다른 사람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썼다. 4개 국어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배운 나는 자신있게 "문법, 그거 아무짝에 소용없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각 언어를 어떤 방식으로 배웠고 얼마나 오랜 기간 공부했는지를 비교해 가면서 왜 외국어 학습에 문법이 중요하지 않은지 얘기해보려고 한다.

 

가장 오랜 시간 공들인 '영어'

우선 영어는 엄마가 맞벌이 하시느라 집에 애들 봐줄 사람이 없으니 학원이라도 보내자는 생각에 초등학교 5학년쯤부터 학원을 다니며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영어로 한마디도 못하던 나는 첫날부터 be동사를 배웠다. 고등학교 때는 단어 외우는 게 그렇게 싫었다. 수학을 좋아하던 내게 영어에서 가장 만만했던 부분이 문법이었다. 규칙과 예외만 알면 되니까. 수능 외국어는 3등급을 맞은 걸로 기억하는데, 평범한 한국 학생답게 독해, 문법, 단어 공부는 주구장창 했어도 회화실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대학교에 가서 영어로 여러번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교양 수업이었던 영어회화는 상중하 수준별 수업이 이루어졌는데, 레벨테스트가 필기로만 진행되었었는지 '상' 레벨 수업에 배정되었다. 원어민 영어 교수님과 수업을 하는 데, 주변 학생들은 다들 영어로 대답도 잘하고 토론까지 하는데, 나는 한 문장 한 문장 뱉어내는 게 고역이었다. 문법이나 단어는 잘 아는데 속상하게 입이 안 열렸다. 교환학생을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외국인 친구들과 유창하게 대화를 하고 싶은데 막상 말을 해야 할 때가 되면 머릿속에서 주어 동사 목적어 순서 맞추고, 동사 변형 체크하고 열심히 문법을 이용해 문장 조립을 하느라 끼어들 타이밍을 다 놓쳤다. 그러는 사이 그들의 대화는 끝나있었다.

내가 영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 이탈리아인 현 남편을 사귀고 나서이다. 연애 초반에는 커뮤니케이션이 정말 큰 걸림돌이 됐다. 남편은 문법은 틀릴지언정 의사표현을 하려고 열심히 할 줄 아는 영어를 쏟아내며 말을 했다. 나는 그 와중에 문법이 완벽한 문장을 뱉어내고 싶어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가는데 정작 그가 열 마디 할 때 한 마디가 겨우 나왔다. 결국 싸울 때, 문법이고 나발이고 서운함을 표현하고 싶을 때, 급하게 나오는 '말'들이 쌓이고 쌓여가며, 회화실력이 늘었다. 문법을 놔줬을 때.

 

별의 별 방식은 다 써본 '독일어'

독일어는 내가 외고를 다니면서 자동으로 독일어과에 배정되어 연이 되었고,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외고라고 해도 교육 방식은 한국식이었다. 독일어 문법, 독해 수업이 90%를 차지했으며 회화수업시간에 원어민선생님과는 소통불가의 처참한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독일어과에 독포자가 그렇게 많았던 기억이 난다. 수능독일어를 준비한다고 각종 문법을 표로 정리해 가며 외우고, 독일어의 특징인 명사 성변화(여성, 남성, 중성)를 하나하나 외우고 앉아있었다. 이렇게 배웠으니 독일어가 어렵게 느껴졌을 수밖에. 그래도 수학을 잘하는 나는 그 어렵다는 독일어 문법을 깨냈다. 문법은 규칙만 알면 되니까. 독일어로 "나는 누구고 몇 살이다." 정도만 겨우 할 줄 아는 상태로 졸업을 하고, 대학교도 어쩌다 보니 독일어 쪽으로 진학을 했다. 대학교라고 크게 다른 건 없었다. 동기의 절반 이상이 독포자였고, 성적을 위해 문법과 단어 공부에 쩔쩔맸다. 회화시간에는 독일 체류경험 있는 친구들의 참여도가 주로 높았고, 나머지 친구들에게는 꽤나 불편한 수업시간이었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독일문화원이라는 독일공식어학원도 다녀보고, 자격증 딴다고 종로에 학원도 다녀보고, 집에서 혼자 독일어 학습 유튜브를 보며 셰도잉 연습도 해봤지만, 입이 트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대학교도 졸업하고, 독일로 워킹홀리데이, 어학연수(현지어학원)까지 섭렵하며 비로소 천천히 독일어로 말을 하는게 가능해졌다. 특히 현지 어학원에 다니면서, 학원 친구들과 유일한 소통 수단이 독일어라서, 문장에 오류가 넘쳐나더라도 개의치 않고 독일어로 대화를 해야만 했던 그 상황 덕분에 자연스럽게 입이 트이게 되었다.

 

한국어와 가장 비슷한 단계를 밟으며 배운 '이탈리아어'

마지막으로 배운 이탈리아어. 한국어를 빼고 외국어 중에서는 가장 짧게 배우고, 가장 조금 배운 외국어. 그러나 내가 제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외국어다. 왜냐? 문법을 한 번도 진지하게 공부해 본 적이 없다. 한국식 외국어 학습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99%가 현지인들과 맨땅에 헤딩하며 키워온 소통실력이다. 내가 제일 처음으로 소통에 이용했던 이탈리아어는(네, 아니요, 감사합니다를 제외하고) Andiamo(가자)였다. 그 다음에는 할머니가 Mangia, Mangia(먹어라) 하시는 걸 들으면서 먹는다는 개념의 단어를 접하게 되었다. 실용적으로 들으면서 배운 이탈리아어는 그들과 지내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내게 '익숙'해졌고. 어느새 내가 할 수 있는 의사표현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외국어는 언어고, 언어는 도구다.

내가 배운 기간을 비교해보면 영어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독일어는 고1 때부터 배운 샘인데, 정작 각 잡고 배운 적도 없는 20대 중반이 되어 시작한 이탈리아어를 더 잘할 수밖에 없는 이유. 바로 언어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자전거의 작동원리를 꿰뚫고 있지만 한 번도 자전거를 실제로 타본 적 없는 사람 vs 자전거에 대해 공부해 본 적은 없지만 매일 자전거를 타는 사람. 누가 더 잘 탈까? 당연히 자전거를 매일 타는 사람이겠지. 자전거는 교통 '수단'이기 때문이다. 도구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원리를 통해 작동하는지 알아야 할 사람은 그 도구를 제작하는 사람이나 전문가들 정도 일 것이지, 일반인이 자전거를 탄다고 자전거에 대해 공부부터 할 필요는 딱히 없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이다. 내가 그렇게 오래 공부한 영어, 독일어를 진짜로 할 줄 알게 된 건, 문법을 마스터했을 때도, 필수 영단어 책을 끝냈을 때도 아니다. 진짜 내 의사표현을 위해 쓰기 시작했을 때다. 문법은 중요하다. 외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나 학자들에게는. 그러나 외국어를 배워서 실제로 소통에 이용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단언컨대 문법 공부를 마지막으로 미뤄두어라. 

나의 문법없이 이탈리아어 학습 후기

나는 아직까지도 이탈리아어 문법 공부를 하지 않았고,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어를 쓰며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고객을 관리한다. 내 목표는 이탈리아어 문법 공부 없이 C1레벨까지 마스터해 보는 것이다. 자신 있다.

 

우리가 현실에서 사용하는 한국어를 생각해 보라. 대화할 때나 심지어 글을 쓸 때도, 문법을 얼마나 정확하게 챙겨가며 이야기하는가. 일반인이라면 그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외국어를 새롭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 특히 한국에서 시험용이 아니라 정말로 현지에서 또는 현지인과 소통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외국어학습 유경험자로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문법은 일단 제쳐두고 시작하세요.

 

(한국에서 수능을 보거나 시험, 자격증 목적 공부하시는 분들이라면 문법공부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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